인천항 갑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갑문으로서 무역의 중심 역할 공간으로 인천광역시 중구에 자리잡고 있다. 1966년 4월 당시 건설부(현 국토교통부)는 기초조사를 시작으로 인천항 제2선거 공사를 착공하였고, 총공사비 217억 원을 투입하여 월미도와 소월미도 사이에 갑거를 축조하였으며, 내항 2, 3, 4부두를 건설하여 1974년 5월 10일 완공했다. 인천항 갑문은 국내 뿐 만아니라 건설 당시 세계에서 6번째 갑문 공사였으며 아시아 최초, 최대 규모였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기록할만한 토목구조물이라고 할 수 있고, 올해 준공 50주년을 맞이한다.
인천항은 조수간만의 차가 10m에 달하여 간조 시 대형선박 접안시설 건설은 일반항만 건설공법으로는 불가능하였다. 이러한 자연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조수간만의 차이와 무관하게 수심이 안정되게 유지되어 24시간 작업이 가능한 갑문식 선거의 건설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인천 내항 전체를 선거화하는 동양 최대의 갑문시설이 완공됨으로써 조수간만의 차에 구애됨이 없이 5만 톤급의 대형선박이 365일 24시간 자유롭게 입항하여 하역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인천항은 1980년대 수출 100억 불 달성에 크게 이바지하여 산업화 시대의 전초 기지로서 활약하였으며, 현재까지 수도권 수출입 관문 무역항으로써의 기능을 안정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공학기술 및 경제 발전에 큰 기여를 하였다.
토목공사 시공 측면에서 인천항 갑문 공사는 인력에 의한 굴착과 토운차에 의한 운반이 중요 수단이던 이전 토공과는 달리 크레인, 굴삭기, 착암기 등 그 당시 현대적인 토공 장비들이 대량 동원된 항만의 기계화 시공의 시작을 알린 공사였다. 또한 시공업체인 동아건설의 50년사에, “동아건설이 중동에서 수주해 시공한 주베일 상업항 1차공사 및 콰디마 항만공사와 같은 대형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시공할 수 있었던 저력은 인천항 건설공사라는 거대한 학교, 훈련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라고 언급되어 있듯이, 현재 세계적 수준을 자랑하는 우리나라의 토목건설 역량 확보에 있어서도 인천항 갑문 건설이 그 시작점이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토목문화유산 심사위원회에서는 아시아 최초이며 최대 규모로 우라나라의 수출입 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영향력과 당시 현대적인 장비가 대량 동원된 항만의 기계화 시공을 알린 공사라는 점에서 인천항 갑문이 공학적 가치 평가 부문 우수한 점수를 받았다. 또한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70년부터 활발해진 수출장려정책의 첨병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경제발전 기여도 부문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한강의 기적에 보이지 않는 손의 역할을 한 수려한 경관을 가진 인천항 갑문은 인천항만공사에서 홍보관을 운영하고 있을 정도로 관리가 잘 되고 있기 때문에, 50주년을 맞이하는 인천항 갑문을 토목문화유산 등록을 추진하는 바이다.